탯줄에서 뽑는 피인 제대혈(臍帶血)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지자 이를 보관하는 사업에 뛰어든 업체들이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고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TV 광고 ·무이자 ·할부 ·경품 제공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교묘하게 다른 업체를 깎아내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업계에서는 지금 추세라면 2~3년 후 신생아의 25~30% 정도가 제대혈을 보관할 것으로 내다본다. 현재의 가격이 유지되면 매년 1,500억원 이상의 시장이 새로 생기는 셈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경쟁으로 가격이 낮아져도 1,000억원 정도는 문제 없을 것 같다”며 “영업이익률 20%의 알짜 사업”이라고 귀띔했다. 제대혈은 백혈병이나 소아암 치료에 주로 쓰이는데 여기에 피를 만드는 조혈모세포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엔 골수에만 조혈모세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골수 조혈모세포에 비해 제대혈 조혈모세포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골수 세포는 항원 6개가 모두 일치해야만 이식이 가능했던 데 비해 제대혈 세포는 최소 3~4개만 맞아도 이식이 가능하다. 거부 반응 등의 부작용을 잘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골수 세포에 비해 채취도 쉽고 안전하다. 제대혈은 재생불량성 빈혈이나 류머티즘성 관절염 등을 치료하는 데도 쓰인다.
제대혈은 보통 15년을 보관하는데 이는 15세가 지나면 소아암 발병률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보관하는 형태에 따라 가족 은행과 공여 은행으로 구분된다. 가족 은행은 본인이나 가족에게만 쓸 용도로 제대혈을 보관하는 방식이다. 건강할 때 자신의 피를 보관했다 수술시에 쓰는 방법과 유사하다. 언제라도 안전한 조혈모세포를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130만~150만원대의 보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공여 은행은 산모가 다른 사람이 쓸 수 있게 제대혈을 기증하는 방법이다. 적십자가 운영하는 헌혈 제도와 유사하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가족 은행이 유독 활성화된 국가다.
제대혈 보관은 유럽에서 먼저 발달했다. 이미 1988년에 세계 최초로 제대혈 이식으로 악성 빈혈을 치료한 사례가 있고 94년에 국가별 공여 은행의 연합체인 유로코드(Eurocord)를 결성했다. 복지 제도가 발달한 유럽에선 가족 은행보다 공여 은행이 활발하게 가동되고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제대혈 이식을 해주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나라는 정부 차원의 제대혈 시설겙桓?기준이나 계획이 현재로선 전무하다. 보관 업체들이 정책 부재의 틈새를 파고 들며 적극적으로 시장을 개척해온 것이다.
현재 국내의 주요 제대혈 보관업체는 10개 정도다. 이 중 녹십자의료재단, KT바이오시스, 차바이오텍, 보령바이오파마, 이노셀 등 올해 새로 생긴 업체가 5개다. 선발 업체인 라이프코드, 메디포스트 등은 기존 우위를 지키려는 입장이고 후발업체들은 맹렬한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라이프코드의 경우 97년 국내 최초로 제대혈 보관사업을 시작했다. 최수환 사장은 “후발 업체들이 늘어나면서 과당경쟁으로 시장 질서가 혼탁해지고 있다”고 전제하며 “이미 축적한 경험과 기술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지나친 마케팅 경쟁은 자제하겠다”고 밝혔다. 라이프코드의 경우 적극적인 언론 홍보나 매체 광고보단 기존 고객들을 활용한 구전 마케팅에 주력한다. 고객이 새로운 고객을 소개하면 1년치 보관료를 할인해주는 식이다.
올해 사업에 뛰어든 후발주자인 녹십자 의료재단은 혈액 관리 분야에서 그간 쌓아온 녹십자의 신뢰성과 노하우를 내세운다.
재단 관계자는 “21년 간 혈액 운송사업을 해온 녹십자와 20년간 임상 검사 업무를 해온 목암 생명공학 연구소가 협력 시스템을 갖추었다”고 밝혔다. 녹십자는 기존에 확보한 병원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유전자 ID 카드 발급 등의 고객 부가서비스도 차별화 전략의 하나다.
신생기업인 KT 바이오시스는 대덕에 위치한 KT 연구단지의 안정성을 강조한다.
양재호 대표는 “전기와 통신 설비가 잘 갖춰져 있고 각종 천재지변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됐다”고 설명했다. 또 ISO 9001 인증과 미국 임상검사 품질 인증 등을 획득해 서비스의 신뢰성을 높이려 한다. 이 업체는 KT 계열사인 점을 활용, 보관료를 전화요금 고지서에 합산해 1년 간 나눠 내는 서비스를 5월부터 선보였다. 이외 다른 업체들도 저마다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며 제대혈 시장에서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제대혈 보관의 효과에 대해 의학계에서는 아직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우선 제대혈의 의학적 안전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다. 삼성서울병원 소아과 유건희 교수는 “제대혈 이식의 성공률은 병마다 다르다”면서 “이식한 조혈모세포의 생착률이나 질병 완치율을 얘기하긴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가톨릭대 세포유전자치료연구소 오일환 교수도 “제대혈 이식 기술은 한참 더 개발해야 한다”며 “업체들이 상용화부터 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현재로선 소아에게만 제대혈 이식이 적용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제대혈 조혈모세포의 양이 골수에 비해 적기 때문. 어른에게 적용하려면 보다 많은 세포가 필요한데 세포 수를 늘려 주는 기술은 아직까진 개발 중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업체측은 기술 발전 속도를 볼 때 이른 시일 내에 해결될 문제라고 주장한다.
정부가 나서 대규모 공여 은행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견해도 많다. 동아대 의대 소아과 이영호 교수는 “탯줄을 공적으로 모아두면 백혈병 환자들에게 삶의 빛이 된다”며 “이를 국가가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 은행이 융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아암 전문의들은 확률적으로 볼 때 공여된 혈액 개수가 6만 개이면 70∼80%가, 8만 개면 90% 이상의 백혈병 환자가 이식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 업체들은 공여 은행도 함께 운영하거나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제대혈을 15년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안전하게 보관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업체들은 저마다 보관 방식과 검사 기술의 우수성을 내세우지만 국내에서 이를 공인하거나 판단할 기준이 현재로선 없다. 극단적인 경우 업체가 부도가 나면 피해를 보상받을 길이 없는 셈이다.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식품의약안전청은 올해 안으로 제대혈 보관에 관한 가이드 라인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포브스코리아 2003년 06월 23일 5호 / 2003.09.26 18:50 입력